
4. 의심했던 성경의 사람들
교회 안에서 의심은 오랫동안 불편한 단어였다. “믿음이 있다면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신앙을 지키기 위한 권면처럼 들리지만 때로는 질문 자체를 죄책감의 대상으로 만들기도 한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 선한 사람이 고통받을 때, 하나님의 뜻이라고 배웠던 것과 현실이 충돌할 때에도 질문을 삼켜야 한다면 신앙은 깊어지기보다 오히려 얇아질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진다. 성경의 인물들은 놀라울 정도로 자주 질문한다. 하나님께 항의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두려워하며, 심지어 자신이 믿었던 것을 행동으로 부인하기도 한다. 성경은 그런 장면을 삭제하지 않았다.
이 점이 중요하다. 성경이 인간의 흔들림을 숨기지 않았다는 사실은 믿음을 ‘완벽한 확신’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반대편에 언제나 의심이 서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신앙의 진짜 반대는 질문조차 하지 않을 만큼 관계를 포기해 버리는 무관심일 수 있다.
욥기의 중심에는 “선한 사람이 왜 고통받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이 있다. 욥은 재산과 자녀를 잃고 자신도 극심한 고통을 겪는다. 친구들은 그의 고난에 반드시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설명하려 한다. 죄가 있으니 벌을 받는다는 식의 단순한 인과응보다.
그러나 욥은 그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고, 하나님과 직접 논쟁하고 싶다고 말한다. 욥기 13장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사정을 내놓고 묻겠다고 선언하며, 하나님이 왜 얼굴을 숨기시는지를 질문한다.
흥미로운 것은 욥이 하나님을 의심하면서도 하나님에게서 도망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하나님을 향해 말한다. 바로 여기에서 욥의 질문은 냉소와 구별된다.
냉소는 “어차피 아무 의미도 없다”며 관계를 끊는다. 그러나 욥의 항의는 “당신이 하나님이라면 내게 대답해 달라”는 요청이다. 질문의 형식은 거칠지만 그 질문의 방향은 끝까지 하나님을 향한다.
욥기의 마지막에서 욥은 모든 고난의 원인을 논리적으로 설명받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지식이 세계와 하나님을 다 담을 수 없음을 깨닫는 방향으로 이동한다. 욥기 42장은 욥이 이전에는 하나님에 관해 들어왔지만 이제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하나님을 마주했다고 고백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욥이 얻은 것은 ‘모든 문제의 정답’이라기보다 자신의 질문보다 더 큰 현실을 만나는 경험이었다.
그래서 욥기는 고난 앞에서 “의심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책이라기보다, 고통받는 인간이 하나님께 어디까지 질문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에 더 가깝다.
도마는 흔히 ‘의심 많은 도마’라는 이름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이야기를 자세히 보면 조금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부활한 예수가 다른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다. 다른 제자들이 “우리가 주님을 보았다”고 말하자 도마는 직접 보고 확인하기 전에는 믿기 어렵다고 반응했다. 일주일 뒤 예수는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 도마에게 상처를 확인하도록 허락한다. 그러자 도마는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강렬한 고백에 이른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예수는 도마의 질문 때문에 그를 공동체에서 쫓아내지 않았다. 오히려 도마가 요구했던 확인의 자리로 들어왔다.
물론 요한복음은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의 가치를 강조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질문하는 사람을 제거하지는 않는다. 예일 성서연구 자료에서도 요한복음 20장의 도마 이야기를 믿음과 의심, 상처와 확인의 문제를 함께 생각하게 하는 본문으로 다룬다.
도마에게 필요했던 것은 억지 확신이 아니었다. 그는 남들의 경험을 빌려 자신의 믿음인 것처럼 말하고 싶지 않았던 인물로도 읽을 수 있다.
이 점에서 도마의 의심은 현대인에게 매우 가까운 질문을 던진다.
“다른 사람이 믿는다고 말하기 때문에 나도 믿는다고 말해야 하는가?”
성숙한 신앙은 때때로 이 질문을 피하지 않는 데서 시작한다. 부모의 믿음, 교회의 믿음, 목회자의 믿음을 반복하는 단계를 넘어 “나는 왜 믿는가”를 스스로 묻기 시작할 때 신앙은 비로소 자기 언어를 얻는다.
베드로의 경우는 욥이나 도마와 조금 다르다. 그는 지적인 의심 때문에 예수를 부인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위협과 두려움 앞에서 자신이 믿고 따르던 관계를 부정했다.
예수가 체포된 밤 베드로는 멀찍이 따라가다가 사람들이 그를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이라고 지목하자 세 차례 관계를 부인한다. 닭이 울고 예수가 자신을 바라보자 그는 밖으로 나가 통곡한다.
이 장면은 신앙의 흔들림이 반드시 사상적 의문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는 하나님이 존재하는지를 철학적으로 의심하지 않으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다. 손해가 두려워 침묵하고, 비난이 두려워 진실을 외면하며, 관계가 깨질까 두려워 옳다고 믿는 것을 포기하기도 한다.
베드로의 실패는 바로 이런 ‘실천적 의심’을 보여준다.
그러나 복음서는 그의 실패에서 이야기를 끝내지 않는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부활한 예수는 베드로에게 세 차례 사랑을 묻고 다시 공동체를 돌보는 책임을 맡긴다. 부인의 세 번과 사랑을 확인하는 세 번이 문학적으로 대응하는 장면으로 읽혀 왔다.
베드로가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실패한 뒤 자신의 눈물을 지나 다시 부름 앞에 섰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믿음은 넘어지지 않는 능력이 아니라,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관계를 선택하는 능력으로 나타난다.
욥과 도마와 베드로를 한데 놓고 보면 세 종류의 흔들림이 보인다.
욥에게는 고통에서 비롯된 질문이 있었다.
도마에게는 증거를 확인하려는 질문이 있었다.
베드로에게는 두려움 때문에 무너지는 행동의 실패가 있었다.
따라서 모든 의심을 하나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신앙교육에서 “의심하면 안 된다”는 말만 반복하면 고통의 질문도, 지성의 질문도, 삶의 두려움도 모두 죄책감 아래 묻힐 수 있다. 그 결과 사람은 질문을 멈추는 대신 질문을 숨기게 된다.
숨겨진 의심은 사라진 의심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와 신앙공동체에는 “왜 그렇습니까?”라고 물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성경과 교리, 과학과 철학, 고통과 죽음, 기도와 침묵에 관한 질문을 정직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모든 의심이 자동으로 신앙을 깊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질문을 자기합리화의 도구로 사용하거나 아무 답도 들으려 하지 않는 냉소 역시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질문의 유무보다 질문을 대하는 태도다.
진실을 알고 싶어 묻는가.
자신의 생각도 수정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답을 즉시 얻지 못해도 탐구를 계속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품은 의심은 믿음의 적이라기보다 믿음의 정화 과정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종종 믿음이 좋은 사람을 ‘확신에 찬 사람’으로 상상한다. 그러나 성경의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인간적이다.
욥은 따져 물었다.
도마는 확인하고 싶어 했다.
베드로는 두려움 때문에 무너졌다.
그러나 세 사람 모두 이야기 밖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질문하고, 실패하고, 다시 마주하고, 다시 관계를 선택했다.
그렇다면 믿음은 어쩌면 “한 번도 의심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의심 속에서도 하나님과의 대화를 끝내지 않는 태도”인지 모른다.
신앙에는 확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확신만큼 정직함도 필요하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말하지 않는 정직함, 고통스러운 것을 괜찮다고 포장하지 않는 정직함, 두려워 무너졌다면 그 사실을 인정하는 정직함이다.
의심을 억압하면 신앙은 단단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질문을 통과한 믿음은 더 깊어진다.
욥의 항변, 도마의 확인, 베드로의 눈물은 우리에게 한 가지 사실을 보여준다.
흔들렸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흔들린 뒤 어디로 돌아가느냐는 것이다.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 바위만이 아니다. 때로는 폭풍 속에서도 끊어지지 않고 다시 하나님을 향해 뻗어 가는 가느다란 실과 같다.













